용서와 화합은 우리네 미덕이라고들 말한다. 타인을 사랑하고 감싸주어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나를 포함한 우리가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들 한다. 과연, 그런 허물까지도 서로 감싸 안아주면서, 서로의 불편함은 그저 묻어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화합하는 것이 진정, 나와 상대방,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나는 적이 많은 편도 적은 편도 아니다. 적이라고 하기에는 과장된 면이 있겠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나는 적당 수의 적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초등학교 때는 (당시 국민학교) 같이 놀던 무리에서 돌아가면서 ‘절교선언’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유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그룹에서 모두가 한 번씩은 다른 멤버들로부터 절교선언을 듣는 것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다. 특정 시기가 되면, ‘절교’라는 한 단어, 혹은 ‘우리 절교야’, 가끔은 아무런 말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를 절교 대상인 아이에게 전해주었다. 직접 주기도 하고, 던지기도 하고, 몰래 놓기도 하고, 참으로 유치한 방식으로 따돌렸다. 기한은 길어야 2주, 그리고 나면 사과하거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울리고, 그 다음 타자가 절교 선언을 맞게 된다. 어쩌면 그래서 누군가와 멀어진다거나, 절교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른다. 하는 입장에서나, 당하는 입장에서나. 그저 12살 어린이들의 한 가지 놀이 방식이었다.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며 싸운 것은 중학교 때 인듯하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무리 중 한 명이었는데, 교실에서 큰 소리 나게 싸웠고, 친구들은 말리고, 그냥 평범한 사춘기 여중생들의 말싸움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크게 번졌고, 그 친구, 우리 집까지 전화해서 나랑 담판을 짓고 싶어했다. 우리에게 무엇이 그렇게 심각했던 걸까. 동시에, 큰 배신감을 느꼈던 시기였다. 내 옆에서 걱정 말라고, 넌 아무 잘못 없다고, 옆에 있어 줄 거니까 동요하지 말라고 말해주던 친구들이 그 다음날엔 너무 차가웠다. 성격상 다가가서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도 못해서 나도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됐다. 같이 밥을 먹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결국엔 따로 먹게 되고, 이유 없는 불편함의 기간이었다. 그 이상한 분위기를 참지 못해서 나는 결국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 나에게 큰 소리를 내었던 아이는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냥 그런 보통 화해였던 것 같다.
-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던 한 아이는 ‘다 괜찮다’고, 그냥 다시 전처럼 지내자고,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해 주었다.
- 안심시켜주던 다른 한 아이는 말했다. ‘네가 잘 못 한 거 알긴 알아?, 그렇지? 네가 잘 못 한 거잖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 아이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냉정했고, 나는 그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 머리 한 편 에서는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 너에게 그런 말 들을 이유는 없잖아’라고 수 없이 소리쳤지만, 그저 미안하다고만 반복했다.
결국, 다시 전처럼 지낼 수는 있었다.
단 한가지, 바뀐 것이 있다면, 나는 불편했고, 다시는 먼저 사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뿐.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아마 두 번째로 크게 싸웠다. 싸움이라고 해봐야 여자애들의 날카로운 소리지름이다.
친했지만, 서로 견제하던 친구였다. 그 아이와는 정말 많이도 질투하고, 멀어지고, 다시 친했다가도 서로 까고, 그런 사이였다. 어쩌면, 서로를 견제하는 재미로 지냈던 것 같다. 싸움에도 핵심은 없었다. ‘난 그냥 너 재수없어’이게 이유고, 핵심이었다. 그러다 편지 한 통으로 다시 화해하고, 머지않아 ‘너 진짜 재수없어’하는 식이었다. 교실에서 한가로이 쉬는 시간을 즐기던 나에게 그 아이가 다가왔고, 다짜고짜 재수없다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나오라며.
누군가 나에게 소리치면, 눈물이 먼저 반응하던 나인데, 이를 악물고 여유롭게 대항했다. 당시에 반장이었던 나는,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눈물 보이지 말자고 1년 내내 다짐했던 시기였던 탓도 있다. ‘싫은데? 여기서 말해? 난 할 말 없거든?’ 일방적으로 나를 불러내던 아이에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유롭게 대했다. 썩은 미소랑 같이. 내가 재수없다는 말에 ‘너도 ㅈㄴ재수없거든? 알긴 아냐?’하면서 지지 않았고, 별 영양가 없이 그런 싸움은 끝났다. 서로를 그렇게 재수없어하면서 지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어느 날인가, 우리가 그 대 왜 그랬는지 이유도 기억하지 못하고, 인사 한 두 마디 나누는 정도는 되었다. 시간 되면 꼭 보자고 한 채로 2년이 넘게 지나긴 했지만 말이다.
나에게는 별 의미 남기지 않은 싸움이었다.
마지막은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기도 했고, 아직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악몽 같은 2007년이다. 내 기억에서 지워버린 해. 큰 덩어리의 기억은 있지만, 무엇을 하면서 지냈는지, 내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정말 힘든 시기였고,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
한 방에 모든 걸 잃어버린 시기였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고, 경황도 없었고, 제대로 대처도 할 수 없었지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화산처럼 쌓이고 쌓이다 ‘펑’하고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믿어도 될 수 있는지 알고자 했던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것을 믿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와 닿지 않아서 믿을 수 없었고, 그렇게 하나 둘씩 주위 사람들을 밀쳐 내버린 시기였다. 아마 지금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간다 해도 또 다시 밀쳐낼 것이다.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서 꽂힌 한 마디는 나를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쫌생이 같은 철부지 22살들의 신경전이었다.
너무 다른 방향으로 새어버렸지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처럼 누군가와 싸워서 적이 되든, 그저 무관심한 사람이 되든 간에 어찌 되었든 이유를 불문하고, 화해하고 화합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하는 것이다.
12월 13일 SBS에서 방송한 야행성 프로그램을 보면 ,문희준과 토니안을 사회자들이 서로 안게하며, 무슨일이 있었든간에 어색한 사이를 풀어주고자 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에서, 그 둘의 표정에서 말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본 것은 단지 나 뿐일까.
둘을 그냥 놔두면 안 되는 걸까?
2007년도에 나를 더 나락으로 빠뜨린 것은 아마 나와 당사자를 화해시키려던 선배들의 노력이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다들 좋은 의미로 그런 것은 안다. 고맙기도 하고.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난 더 상처받았고, 더 이상 못해먹겠단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어릴 적 그랬듯 물 흐르듯 넘어가면, 다시 합쳐지든, 완전히 갈라지든 큰 상처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었을 텐데, 왜 억지로 붙여 놓으려고 했던 걸까. 결국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으니 하는 말이다.
지금은 다들 무심코 ‘네 친구들은 뭐하냐’하는 말에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의연해졌다.
왜 처음부터 다들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왜 그냥 두고, 잠잠해지게 기다리지 않았을까.
왜 서로 싫다고 밀쳐낸 이들을 억지로 붙여보려고 했을까
진정으로 그 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기 힘든 제3자,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3자 입장에서 그 상황이 불편하면, 둘 중 하나를 포기하면 된다. 얘와 함께 하던지, 쟤와 함께 하던지. 둘 다 놓치고 싶지 않다면, 각각의 둘을 다 곁에 두면 된다. 같이 있는 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이 좋았던 너희들이 서로 미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래’라는 어줍잖은 배려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적어도 나에게는, 불편하고 거절하고 싶은 배려이다.
둘로 갈라진 장식물을 억지로 붙여 놓으면, 원상태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 균열은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다시 갈라진다. 하지만, 그 각각을 다듬어 장식해 놓으면, 새로운 2개의 장식물이 되지 않을까? 조화로운..
가끔은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는 상태로 두는 것도, 불편한 상태로 두는 것도, 당사자를 진심으로 고려한다면, 좋은 방법일 텐데..
억지로 붙이려 하지 않은 것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다듬어져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형태로 조화롭게 된다고 생각한다.
서로 불편함을 가진 채로 다시 하나가 된 조화보다는, 서로 가지고 있는 불편함을 내 보이고, 인정해 주면서,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것들과 이루는 새로운 조화가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 그냥 최근에, 이런저런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짜증이 나고 있던 차에
TV쇼를 보다가 답답해져서 써본다.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